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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카바레트(Kabarett) 연구회

카바레트(Kabarett) 발전사

 

카바레트에 대한 이해를 일반인들에게 알리고자 2가지 부분을 전제하고자 한다.
 
전제 1.
이하 카바레트의 개념, 발달사, 구성, 기능 항목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정민영 교수의 논문 '독일어권 카바레 연구(2004, 2005)'를 전체적으로 올려놓아 일반인들이 전반적으로 카바레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의 독일어권 카바레트 연구는 독문학계에서의 접근으로 한정시킬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오늘 대한민국에 독일어권 카바레트(Kabarett)를 일반인들이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카바레트라는 장르의 한국내 전파와 발전에 있어서 분명 큰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먼저 전제하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는 '카바레'라는 불어식 전통적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한국카바레트연구회는 전제 2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이유에서 전통적 프랑스 카바레를 제외하고는 '카바레'를 '카바레트'로 바꾸었다.
 
전제 2.
1. 현재 프랑스의 카바레(Cabaret)와 독일어권의 카바레트(Kabarett)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일반인들이 가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차이는 유사성을 바탕으로 내용의 다양성, 표현방식, 특성과도 관계된다. 또한 한국에서의 연구는 전반적으로 독일어권 카바레트(Kabarett)에 관련된 연구이기에 우리는 '카바레'라는 용어를 전환하고 독일어 '카바레트(Kabarett)'를 사용한다.
2. 한국 내의 카바레가 가지는 이미지에 대하여 긍정적 카바레트 문화 이미지를 사회전반에 전파하기 위하여 독일어 '카바레트(Kabarett)'를 사용한다.
3. 우리 한국카바레트연구회의 김주권(KIMI)은 현재 독일 비스바덴과 마인츠를 중심으로 카바레트 공연 활동을 하고 있으며 독일카바레트박물관, 프룩수스, 파리저 호프테아터 및 독일카바레티스트협회 등과 관계하고 있다. 우리는 독일어권 카바레트를 한국에 전파 발전시켜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모색하고 있는바 당연히 '카바레트(Kabarett)'를 사용한다.
4. 우리 한국카바레트연구회는 카바레트를 단순한 풍자적 유머로서의 접근이 아닌 지성인을 위한 형이상학적, 심미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독일어권 카바레트 연구 (1) - 카바레트의 개념 및 발달사 - 정민영(한국외대)

 

이 논문은 2004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지원으로 작성된 것임 (과제번호: 2004-074-AM0127). 구체적인 작품 및 공연현장에 대한 소개, 분석은 연구원들의 공동연구를 통해 후속 논문으로 발표될 것임.
 
3. 발달사

 

3.1. 기원
카바레의 기원은 1881년 11월 18일, 프랑스 몽마르트에 살리(Rodolphe Salis)가 세운 주점 <검은 고양이 Chat noir>이다. 이 주점은 예술인 주점으로서 여기에서 예술가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자신들이 창작한 작품을 마음껏 소개하였다. 이 주점에는 점차 예술가가 아닌 일반인들도 들어오게 되었고, 손님 층의 확대와 더불어 ‘예술인 주점’은 문학적 카바레가 되었다. 이 같은 새로운 예술적 분위기가 형성된 동인으로는 대중적이고 진부하기만 한 버라이어티 형식의 공연에 대한 반감, 보헤미안의 자유분방함에서 영향 받은 즉흥성과 선동성에 대한 애호, 그리고 자연주의와 협소한 모든 시민근성에 대한 반발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카바레는 일반적인 공공의 삶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 그 시대의 관심을 반영하면서 반어적으로, 그리고 무제한으로 비판하는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검은 고양이>의 프로그램에는 카바레가 지향하는 방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성들을 조롱할 것이며 인간들을 깨우쳐 줄 것이다. 그들에게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을 것이며, 불만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나빠진 기분을 제거해주고 속물들에게 삶의 양지가 어떤 것인지 보여 줄 것이며,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거짓 가면을 제거해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문학적 즐거움을 위한 재료를 얻기 위해, 한밤중에 고양이들이 지붕 위에서 그렇게 하듯이 귀를 기울이며 이리저리 몰래 돌아다닐 것이다.

Wir werden politische Eigenschaften persiflieren, die Menschheit belehren, ihr ihre Dummheit vorhalten, dem Mucker die schlechte Laune abgew?hnen, dem Philister die Sonnenseite des Lebens zeigen, dem Hypochonder die heuchlerische Maske abnehmen. Und um Material f?r diese literarische Unterhaltungen werden wir lauschen und herumschleichen, wie es nachts die Katzen auf den D?chern tun.

 

3.2. 독일의 카바레트

프랑스에서 <검은 고양이>와 같은 예술인 주점이 생겨나던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도 노래와 곡예 등 버라이어티 쇼 형식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바리에테 Variet?가 생겨났다. 이 같은 극장은 가볍고 저속한 음악이 연주되고 쇼가 공연되는 대중 주점이라는 의미를 가진 팅엘탕엘 Tingeltangel이라 불렸다. 프랑스의 예술인 주점, 카바레와는 달리 이곳을 찾는 계층은 수공업자와 노동자 등 소시민과 프롤레타리아였으며, 이곳에서는 주로 마술쇼, 동물쇼, 복화술쇼, 에로틱한 샹송, 가벼운 시사 풍자 공연이 이루어졌다. 1890년대에 들어 베를린과 뮌헨의 예술가들은 이 같은 주점 문화를 토대로 한 독일 카바레트의 이념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 Otto Julius Bierbaum과 에른스트 폰 볼초겐 Ernst von Wolzogen은 독일 카바레트 극장을 만들고자 하였고, 프랑스식 카바레의 전범을 따르기보다는 이미 독일의 소시민 문화에 자리 잡아 넓은 관객층을 확보하고 있었던 바리에테와 팅엘탕엘의 전통을 받아들여 이를 보다 높은 예술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자 하였다.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은 자신의 소설 [슈틸페, 개구리 관점에서 이루어진 소설 Stilpe. Roman aus der Froschperspektive](1897)에서 주인공 빌리발트 슈틸페 Willibald Stilpe가 베를린에 예술적인 팅엘탕엘 극장을 세우는 내용으로 당시 저속한 음악 공연으로 간주되던 팅엘탕엘에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또한 그는 1900년에 프랑크 베데킨트 Frank Wedekind, 에른스트 폰 볼초겐 등과 함께 소규모 카바레트 무대를 위한 노래 모음집인 [독일샹송 Deutsche Chansons]을 편집해 커다란 성공을 거둔 이후 본격적으로 카바레트가 하나의 공연예술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은 독일 바리에테에서 출발한 카바레트 무대가 하나의 연극무대로서 고전적인 도덕적 기관이 아니라 보다 많은 대중이 즐길 수 있는 미학적 기관이 되길 원했다. 바리에테는 변화와 다양함, 그리고 상이한 의미의 병존, 속도, 실험을 내재하고 있는 무대로서 항상 새롭고 살아있는 의미를 요구하는 관객에 방향을 맞춘 새로운 근대정신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독일에서는 이미 19세기에 민중들이 자신의 억눌린 불만과 감정을 유머와 풍자를 통해 풀어내고, 정권이나 권위 등 모든 억압체계에 저항하는 의미있는 정치적 무기로 유머와 풍자의 다의성을 사용하는 전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문학적, 예술적 가치를 부여한 새로운 독일 카바레트는 하나의 도전적 예술운동이었다. 

1901년 1월 18일, 볼초겐은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에 독일 최초의 카바레트 <다채로운 극장 Buntes Theater>를 개관한다. 그는 이 카바레트에 ‘초(超) 카바레트 ?berbrettl’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는 니체의 사상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기존의 주점 무대식 카바레트 Brettl 보다 위에 서야하는 새로운 카바레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명칭은 기존 주점무대 공연의 극복으로서 유흥업소의 철저한 오락공연을 문학, 예술적 수준으로 끌어 올려 다양한 입맛을 가진 관객들에게 다양한 형식을 갖춘 작은 예술을 제공하려는 볼초겐의 의도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 극장은 시대비판적인 풍자시 Couplet, 문학작품의 패러디, 판토마임, 단막극, 인형극, 그림자극, 유머가 담긴 낭독, 에로틱한 샹송, 막간의 춤 공연 등을 다양하게 제공하였다. 볼초겐이 요구한 것은 무엇보다도 낡은 가치의 변화와 권위에 대한 경멸이었다. 뒤이어 1901년 1월 23일, 막스 라인하르트가 이끄는 <울림과 연기>가 베를린에 공식 등장한다. 볼초겐의 <다채로운 극장(초 카바레트)>과 비교하여 이 카바레트는 전통적 사고방식과 시대에 뒤떨어진 도덕관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훨씬 성공적이었다. 특히 문학작품을 패러디하는 작업에 있어서 이 카바레트는 독특한 역량을 보였다. 예를 들어 하우프트만 Gerhart Hauptmann의 [직조공 Weber]을 패러디하여 옷 잘 입고, 닭고기와 고급 포도주를 즐기는, 사회비판과 혁명적 특성과는 거리가 먼 직조공을 만들어내 당시 소시민의 속물근성을 비판함으로써 <울림과 연기>는 문학 카바레트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다채로운 극장> 보다 약 3개월 뒤, 뮌헨에서 만들어진 <11명의 사형집행인>은 속물에 저항하는 시대비판의 투사 역할을 함과 동시에 문학과 오락을 결합시키는 노력으로 초기 독일 카바레트 확립에 기여하였다.

문학적 성향이 강했던 초기의 독일 카바레트는 1차 세계대전 직전 표현주의 문학과 예술운동이 대두하면서 새로운 예술적 동인을 얻는다. 카바레트는 새로운 형태의 열정 Pathos과 극단성으로 당시 시민문화가 가지고 있었던 공허한 비장감과 무감각증을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이 시기의 카바레트는 열정이라는 개념을 보편적인 쾌활함과 격렬한 웃음으로 이해했다. 1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극단적인 민족주의는 독일에서 검열제도를 더욱 강화시켰고 이 같은 상황에서 풍자와 패러디를 생명으로 하는 카바레트는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공부하고 뮌헨의 소극장에서 연극 작업을 하고 있었던 후고 발 Hugo Ball은 1915년 5월, 여배우 에미 헤닝스 Emmy Hennings와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916년 2월 5일, <카바레트 볼테르 Cabaret Voltaire>를 창단한다. 이 카바레트는 반전 예술의 선두 주자가 되었고 다다 운동 Dada-Bewegung의 국제적 중심 무대가 되었다. 전쟁 이후, 1920년대 독일 카바레트는 관객층이 확대되면서 시대의 관심에 따른 정치적, 사회적 풍자에 방향을 둔 새로운 형식을 받아들인다. 쿠르트 투홀스키 Kurt Tucholsky, 발터 메링, 에리히 케스트너 Erich K?stner 등은 환멸과 냉소, 조소에 인간의 따뜻한 감정과 이성, 그리고 세상에 대한 연민을 혼합시키면서도 거짓의 가면을 벗겨 핵심을 찌르는 공격성 강한 카바레트 양식을 발전시켰다. 1920년대 중반부터 독일 카바레트는 즉흥성에서 벗어나 완성된 텍스트를 기초로 한 드라마적 레뷰 Dramatische Revue의 형식을 갖는 경향을 보인다. 공연무대는 사실적인 무대로 규모가 커졌고 여러 작품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공연하는 프로그램 형태로서 다양함이 서로 공존하는 무대로 발전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독일 카바레트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카바레티스트가 등장했는데 그가 칼 발렌틴 Karl Valentin이다. 그는 전통적인 광대 모티브와 ‘언어 무정부주의’라고까지 불리는 독특한 언어예술, 그리고 브레히트의 생소화 기법을 선취하고 있는 연기를 통해 불투명한 사회구조와 전도된 세계상을 그려냈다. 발렌틴은 광대의 시각으로 개인과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관계를 밑에서부터 철저하게 드러내 비판하고 희극적인 과장과 의미전도의 언어기법을 통해 고착된 사고유형을 파괴하고 해체한다. 특히 그의 작업은 동시대의 인간과 사회를 떠나지 않는 철저한 민속성에 기초하고 있어 민중희극 Volkskom?die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같이 다양한 형태로 전성기를 맞이하던 독일의 카바레트는 국가사회주의로 인해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카바레트인들이 망명을 해야 했으며 남아있었던 카바레트 <지하납골당 Die Katakombe>, <4인의 보도원 Vier Nachrichter>은 곧바로 공연금지를 당했다. 독일의 카바레트는 망명의 형태로, 유랑카바레트로 명맥을 이어가야 했다. 특히 1933년 1월, 뮌헨에서 에리카 만 Erika Mann과 클라우스 만 Klaus Mann 남매의 주도로 창단되었던 카바레트 <후추분쇄기>는 히틀러에 대한 투쟁을 목적으로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한다. 1933년 10월 1일, 취리히에서 활동을 다시 시작한 <후추분쇄기>는 정치적 의도를 교묘하게 감춘 민속동화 각색 작업을 통해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를 용인한 독일의 우둔함과 야만성을 공격했다. 또한 이 카바레트는 <다채로운 극장>과 <11명의 사형집행인>이 토대를 놓았던 문학 카바레트의 전통을 받아들이고 직접 가하는 공격이 아닌 간접적인 공격의 형태인 풍자의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표현 방식으로 어려운 망명 환경을 극복해 나갔다. 1934년 바젤에서 공연된 동화 각색 카바레트에서 에리카 만은 ‘행복하게도’ 자신의 일, 재산, 시민권, 고향을 빼앗긴 망명자 ‘행복한 한스 Hans im Gl?ck’를 만들어내고 그녀 자신은 비행사 모자에 말채찍을 차고 검은 색 나치스 친위대 장화를 신은 멋진 ‘거짓말 나라의 왕자 Prinz von L?geland’로 등장하여 한 번 거짓말은 믿지 않지만 매일 하는 거짓말은 믿게 된다는 풍자적 노래를 부른다.

1945년 이후, 새로운 많은 카바레트들이 구성되면서 끊어진 전통을 새로 일으켜 세우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예전의 레파토리를 다시 다양하게 다루는 무대가 만들어졌다. 뮌헨의 <가설공연장 Die Schaubude>과 <작은 자유 Kleine Freiheit>, 베를린의 <울렌슈피겔 Ulenspiegel>, <호저 Die Stachelschweine>, 슈투트가르트의 <쥐덫 Mausefalle>,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윤활유 Die Schmiere> 등의 카바레트는 즉흥성, 희극성, 폭로, 아이러니, 그리고 인간의 도덕이 조화를 이루면서 핵심을 공격하는 짧은 형식으로 카바레트 공연양식의 전통을 이었다. 특히 <호저>가 서베를린을 대표하는 카바레트로서 전통을 이었다면, 동베를린을 대표하는 카바레트는 <엉겅퀴 Die Diestel>라 할 수 있다. 1953년 10월에 동베를린 시의회의 지원으로 창단된 <엉겅퀴>는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 국립극장과 같은 행정체제를 갖추고 동독시민이 가지고 있었던 일상의 어려움에서 주제를 이끌어냈으며 다른 한편으로 암시적이고 간접적이긴 했지만 당 고위층에 대해 비판도 가하는 카바레트 본연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미 1960년대 이후 초창기 카바레트 운동이 가지고 있었던 강한 정치-사회 비판의 ‘작은 예술 Kleinkunst’ 이념, 그리고 그것에 토대를 둔 즉흥성과 유연성, 개방성은 점차 퇴색하고 있었다. 독일 사회 일반에서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카바레트에서도 정치에 대한 짜증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정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소비문화의 세대는 카바레트가 전통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풍자적, 문학적 추진력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현상 속에서 현재의 독일 카바레트는 전통적으로 다루어왔던 시사 정치적 문제보다도 인간의 삶 자체와 일상의 작은 문제를 소재로 삼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공연 방식도 쇼와 애니메이션의 활용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여러 배우가 등장하는 전통적인 앙상블 공연이외에 솔로 카바레트의 형식이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3.3. 오스트리아의 카바레트

오스트리아 카바레트는 볼초겐의 <다채로운 극장>을 본보기로 삼아 시작되었다. 1901년 11월 16일, 작가이자 연극비평가인 펠릭스 잘텐 Felix Salten은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을 위한 젊은 빈 극장 Jung-Wiener Theater zum lieben Augustin>을 창단했다. 그는 시와 음악, 춤의 현대적 결합을 위한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였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906년, 빈에 세워진 카바레트 <밤의 불빛 Nachtlicht>을 본격적인 최초의 카바레트로 간주한다. 이 카바레트는 뮌헨의 <11명의 사형집행인>이 문을 닫은 후, 그 멤버였던 마크 앙리 Marc Henry, 한네스 루흐 Hannes Ruch 등이 빈으로 들어와 창단한 카바레트였다. <밤의 불빛>은 <11명의 사형집행인>이 공연했던 레파토리를 혼합한 작품을 공연하였다. 그러나 이 카바레트도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문을 닫았다. 마크 앙리는 1907년 초에 다시 빈에 <카바레트 박쥐 Cabaret Fledermaus>를 창단했다. 이 카바레트는 문학 카바레트로서 프랑스의 민요를 무대화하기도 하였고 단막극 형태의 공연을 하기도 하였으나 1913년 문을 닫았다. 그러나 1912년, 빈에 창설된 <짐플리시씨무스 Simplicissimus>는 칼 파르카스 Karl Farkas와 같은 걸출한 카바레티스트의 활약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카바레트로 자리 잡았다. 카바레트 <짐플리시씨무스>는 뤼벡 출신으로 빈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에곤 도른 Egon Dorn에 의해 1912년 10월 25일, “맥주카바레트 짐플리씨시무스 Bierkabarett Simplicissimus”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으며 간단하게 “짐플 Simpl”로 불린다. 이 카바레트는 독어권 카바레트 중 가장 전통을 자랑하는 카바레트로서 현재도 활발한 공연을 보여주고 있으며 극장 자체도 창설 당시의 장소인 Wollzeile 36번지에 그대로 위치하고 있다. <짐플>은 전통적으로 정치성과 거리를 둔 오락 카바레트 공연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강한 풍자와 문학성을 여전히 유지함으로써 문학 카바레트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 이 카바레트의 특징이다. <짐플>은 칼 파르카스가 사회자 Conf?rencier의 역할을 맡아 등장함으로써 독특한 특색을 갖추게 되었다. 파르카스는 1971년 사망할 때까지 이 카바레트의 예술 감독을 지냈으며 주연 배우로도 활동했다. 그는 1924년 프리츠 그륀바움 Fritz Gr?nbaum과 함께 카바레트 공연에 두 명이 함께 극을 진행하는 2인 공연 형식과 레뷰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카바레트의 새로운 공연 양식을 발전시켰다. 파르카스의 주도로 <짐플>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각광받는 카바레트로 성장했다. 1974년에 <짐플>을 넘겨받은 마르틴 플로스만 Martin Flossmann은 오락과 즐거움을 위한 카바레트라는 파르카스의 카바레트 원칙을 충실하게 지켰다. 특히 그는 ‘카바레트 레뷰 Kabarettistische Revue’라는 장르를 발전시켰고, 이 전통은 1993년부터 예술 감독을 맡은 미하엘 니아바라니 Michael Niavarani 체제에서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짐플>은 후고 비너 Hugo Wiener, 에른스트 스탄코프스키 Ernst Stankovski와 같은 유명한 카바레티스트들을 수 없이 배출했다. 특히 춤과 노래, 풍자를 혼합한 화려한 버라이어티 쇼 형태의 레뷰 양식을 카바레트 공연에 접목한 새로운 공연 양식은 <짐플>의 공로로 인정받고 있다.

초기 오스트리아 카바레트는 익살스럽고 가벼운 유머가 특징이며 정치적 성향은 약했다. 정치 카바레트는 1930년대에 비로소 <사랑하는 아우구스틴 Lieber Augustin>, <구즈베리 Die Stachelbeeren>, <ABC>와 같은 카바레트를 통해 빈에서 자리 잡았다. 특히 1931년 스텔라 카드몬 Stella Kadmon에 의해 문학 카바레트로 창단된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은 초기에 문학작품의 패러디와 패러디를 기반으로 하는 춤, 즉흥극으로 공연하였으나 1933년부터 정치 상황에 방향을 둔 공연으로 그 공연양식을 바꾸고 투홀스키, 에리히 케스트너 등의 깊이 있는 텍스트를 공연함으로써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오스트리아에서는 30년대부터 카바레트를 유흥주점의 단순한 쇼와 구분하기 위해 ‘작은 예술 Kleinkunst’이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였다. 나치 시기에 오스트리아 카바레트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수많은 카바레티스트들이 체포되거나 망명을 떠났다. 이들은 런던(푸른 다뉴브 클럽 Blue Danube Club, 1938), 뉴욕(비엔나 연극단 Viennese Theatre Group, 1938), 로스 엔젤레스(자유 무대 Freie B?hne, 1939) 등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카바레트는 오락 카바레트와 정치 카바레트가 서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지속되었다. 1952년에 헬무트 크발팅어 Helmut Qualtinger, 게르하르트 브론너 Gerhard Bronner, 게오르그 크라이슬러 Georg Kreisler, 페터 벨레 Peter Wehle, 칼 메르츠 Carl Merz는 ?머리 앞 카바레트 Brettl vor'm Kopf?란 제목의 프로그램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다. 카바레티스트, 작가, 작곡가, 연주가들이 동시에 앙상블로 무대에 서서 공연하는 것이다. 이 같은 형식의 카바레트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현대 카바레트 공연 양식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뒤이어 50년대 말에는 카바레트가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됨으로써 새로운 카바레트 관객층이 형성되었다. 또한 오스트리아 카바레트는 1960년대에 들어 문학의 여러 형식을 도입하는 가운데 풍자를 이용해 오스트리아 현대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카바레트로 발전했다. 60년대의 카바레트 극단 중 1959년에 그라츠에서 창단된 카바레트 <주사위 Der W?rfel>는 초현실적인 요소와 현대사의 부조리한 면을 풍자의 형태로 풀어 60년대 오스트리아 카바레트의 새로운 차원을 연 극단으로 평가받는다. 오스트리아 카바레트는 1970년대에 세대 교체 시기를 맞는다. 특히 시사적이고 그 때의 정치적 사건들에 방향을 맞춘 고전적인 카바레트는 록음악, 레뷰 등 새로운 형식을 도입한 화려한 공연으로 대체되고 확대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시사 정치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비판과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우스꽝스럽고 특이한 일들을 소재로 사회를 비판하는 새로운 정치 및 시대비판 카바레트가 활성화되었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 카바레트의 특수한 경향은 솔로카바레트 Solokabarett로 방향이 바뀌었다는 데 있다. 1980년대 초, 오스트리아 카바레트는 많은 카바레트가 새로 생겨나면서 붐을 맞는다. 젊은 카바레티스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카바레트 구성의 틀을 파괴하고 전통적인 정치적 위트와 시사적 사건과 관련한 소재를 거부한다. 이들이 카바레트를 통해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추상적인 정치 관련 주제보다도 ‘인간’이다. 이는 현대 오스트리아 카바레트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오스트리아 카바레트는 1990년대 이후 독일 카바레트의 영향을 받고 있다. 

 

4. 맺는 말 - 카바레트의 한국 공연예술계 적용 가능성

독어권의 카바레트들은 시대에 따라 그 시기에 적합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공연의 주제로 삼아 발달해 왔다. 따라서 카바레트는 특히 다른 예술 분야보다도 사회참여의 성격이 뚜렷한 공연예술이며 아울러 그 소비층인 관객과의 의사소통 방식에 있어서도 다른 예술 분야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적극적이다. 매체의 발달로 공연예술의 입지가 좁아진 현재 상황에서 카바레트는 공연예술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공연예술과 관객의 새로운 관계 정립 문제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카바레트는 노래, 춤, 판토마임, 인형극, 그림자극 등 타 예술장르를 생산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장르와 형식의 통합을 이루어내고 비언어적, 육체적 언어를 통해 관객과의 의사소통 범위를 확대하여 어느 면에서는 연극보다 앞선 표현 형식을 갖추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카바레트는 공연자의 파트너를 다른 공연자가 아닌 관객으로 삼는 직접적 의사소통 형식으로 예술 소비자와 가장 적극적인 교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비제도권의 예술로서 어느 예술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롭다.

이와 더불어 카바레티스트들은 대부분 배우, 연출, 극작을 겸하는 것이 특색이다. 현재 공연예술계는 화술의 완벽한 구사는 물론, 노래와 춤, 악기 연주까지 겸할 수 있는 완벽한 기능의 배우를 요구한다. 그러나 기능에 치우친 배우에 대한 요구는 텍스트 분석 능력이 미비한, 말하자면 기술만 가진 배우를 양산해 냈다. 카바레트 공연을 위한 텍스트를 쓰고 스스로 연기하는 독어권 카바레트 배우들의 넓은 예술활동 범위는 우리의 배우들에게도 자극제가 될 것이며 배우들의 발전을 위한 본보기를 제공할 것이다.

또한 카바레트가 지니고 있는 대중성과 예술성, 말하자면 예술과 오락을 연계한 무형식의 자유로운 공연 양식은 우리 연극의 대중성 확보, 이를 발판으로 하는 서울, 대학로의 지역성 탈피, 그리고 나아가 공연 예술을 통한 보다 민주적인 문화발전을 이루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연극의 사회적 기능 강화와 재정 문제의 극복, 관객의 참여도 강화, 그리고 배우의 기능 강화에 카바레트는 하나의 예로서 훌륭한 토대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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